2009년 04월 14일
신발을 잃다 - 이재무

신발을 잃다
소음 자욱한 술집에서 먹고 마시고
웃고 더들고 한참을 즐기다 나오니
아직 길도 들지 않은 새 신 종적이 없다
구멍난 양심에게 온갖 악담을 퍼붓다가
혈색 좋은 주인 허허허 웃으며 건네는
다 해진 신 신고 문 밖으로 나오는 길
기다리고 있엇다는 듯 찬바람,
바람에게도 화풀이를 하며 걷는데
문수 맞아 만만한 신
거짓말처럼 발에 가볍다
투덜대는 마음 읽어내고는 발이 시키는 대로
다소곳한 게 여간 신통하지 않다
그래, 생이란 본래
잠시 빌려쓰다 제자리에 놓고 가는 것
발과 신이 따로 놀다가
서로를 맞추고서야 신발이 되듯
불운도 마음 맞추면 때로 가벼워진다
나는 새로워진 헌 신발로 스스로의 다짐
때마침 내리기 시작한 눈에 도장 꾹꾹 찍으며
대취했으나 반듯하게 집으로 간다
기승전결이 평범하기 그지 없으나
평범하기 그지 없어서
술을 마시지 않고도 취할 수 있는
이런 시를 쓰고 싶다.
아니 쓰고 싶었다.
근데 쓰고 싶은 줄 몰랐었다.
시가 내 발에 맞지 않는 것 같아 벗어 놓았다기보다는
문수 맞지 않는 신발을 동경한 죄,
내 발과 내가 가진 신이 길이 들기도 전에,
신발이 되기도 전에 딴 집에 벗어 놓고 온 것 같은 아쉬움은
언제나 술 취한 밤을 찝찝하게 했다.
전위대를 동경한 죄,
몇 교수님의 칭찬에 자만한 죄,
개 허접데기 같은 관념의 쓰레기를 동아리에 가져갔다가,
후배들의 의아함이 담긴, 알 수 없는 시선에
우쭐한 죄로,
난 내 발에 맞는 신을 몰라뵀고,
알아뵀을 때는 이미,
시에 대한 허기는 사그라든지 오래였다.
최근 들려온,
친분이 있는 사람의 등단을
축하해 줄 수는 없었고,
그렇다고 배아파하지도 않았지만,
그 후자보다는 축하해주지 못하는 나의 얄랑함이 더욱 날 후벼파서,
여러가지 죄의 복합들로,
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하건간,
이쪽 공부를 열심히 해서 학계의 그럴 듯한 연구자가 되건,
혹은 게으름에 파묻혀 찌질한 베짱이가 되건,
책장 한 켠에 쌓인 시집 한 권을 꺼내 잡고
눈물 흘리며 자는 밤은 많을 것 같다.
# by | 2009/04/14 02:33 | 어느별에서의 시 | 트랙백 | 덧글(7)





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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